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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
스토리이알피
연산군, 광해군 [연산군, 광해군은 왜 이름에 조, 종을 붙이지 않았을까? (묘호와 군호)] 우리는 세종, 영조, 고종 등 두 글자의 왕이름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연산군과 광해군의 왕이름은 세글자이며 군으로 끝납니다. 즉 광해군, 연산군은 군호만 있고 묘호는 없는 것입니다. 물론 연산군과 광해군이 폐위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세한 과정은 모르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에 대해 설명합니다. 광해군, 연산군의 묘호과 군호 '군호'는 왕의 아들일 때 주어진 이름입니다. 왕의 아들조차도 신하들이 함부로 이름을 말할 수 없기에 수양대군, 연산군, 광해군 등으로 불렀습니다. 참고로 연산군의 '존호'는 헌천홍도경문위무대왕(憲天弘道經文緯武大王)이고, 광해군의 '존호'..
세종대왕은 칭찬과 비판을 동시에 생각한다고 해도 출중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금 문제를 해결하려던 중에 세종대왕은 최초의 여론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무려 17만 명의 백성이 참여한 여론조사를 통해 세종은 비로소 법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15세기에 백성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국가 시스템을 계획하였다니 놀라운 일입니다. 세종의 최초의 여론조사 동양이든 서양이든 군주가 백성의 생각을 묻는 경우는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더라도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기록상으로 현대의 직접적인 최초의 여론조사는 1824년 미국의 대통령 선거 여론조사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15세기 조선시대에 여론조사라는 것을 했었습니다. 이때가 세종 12년, 1429년의 여론조사입니다. 건국 된 지 겨우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