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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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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Storyerp 2020. 11. 13.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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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룸살롱 사건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dahami.com)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서진룸살롱 사건이란 1986년 서울 강남의 대형 룸살롱인 서진회관에서 있었던 조폭들의 충돌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진짜 조폭 짓을 해오던 맘보파와 조폭이 된 목포파가 있었고, 목포파가 맘보파 조직원 4명을 무참하게 살해한 것이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진실입니다.

 

가해자인 목포파에는 정요섭, 장식선, 김동술, 고금석 등 11명, 피해자인 맘보파에는 오재홍, 고용수, 조원섭 등 7명이 있었습니다. 가해자 중 2명은 사형당하는데, 그 중 고금석에게 사랑을 바쳤던 여인이 있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서진룸살롱 사건이란​

'서진룸살롱 사건'은 계획적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맘보파의 일행이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조직원 축하 술 모임이 있었고, 하필 그 옆에 조폭이 된 대학생 조직인 목포파가 술을 마시고 있었던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목포파는 용인 유도대학의 선후배들이 모여 서진회관을 관리해준다며 만든 애송이 건달 조직이었습니다. 한편 맘보파는 범서방파의 김태촌 아래에서 따로 만든 조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행동대장 조원섭은 김두한 이후 최고의 싸움꾼이라는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 ⓒ Unknown 

 

문제는 맘보파 조폭들이 웨이터가 마음에 안 든다며 마구 폭행한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이를 들은 목포파가 따지러 갔지만 맘보파는 그들을 완전히 무시했습니다. 맘보파는 수년간 실전 경험이 있는 조폭들이지만, 목포파는 두목을 제외하고는 대학생 등 20대 초반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맘보파가 술에 만취해서 무방비 상태라는 것을 안 목포파는 칼과 몽둥이 등을 들고 휘둘렀습니다. 제아무리 실전 싸움꾼이라고 해도 좁은 곳에서 많은 상대에게 무기로 당하면 어쩔 수 없는 법, 결국 조원섭, 송재익 등 4명이 난자당해서 살해되었습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목포파 조직원들은 속으로 무서워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싸움꾼 조원섭이 특히 집중 공격을 당했습니다. 서진룸살롱 사건의 상황은 처참했습니다. 사지가 절단되고 40여 회나 사람을 찌르는 아비규환의 상황이 40여 분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맘보파 중 한 명은 도망, 또 한 명은 숨어서 화를 면했고, 또 한 명은 일이 있어 먼저 갔기에 살아남았습니다. (이때 살아남은 그는 나중에 2007년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이 조폭을 개입 시켜 보복폭행을 했다는 사건에서 다시 등장하기도 합니다)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 ⓒ dahami.com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이 있고 난 뒤, 목포파는 4명을 차에 싣고 인근 병원으로 가서 교통사고 환자라며 던지듯이 내려놓고 가 버렸습니다. 결국 4명은 모두 죽는데 병원에서는 혼비백산해서 신고하게 됩니다.

 

서진회관 살인 사건 다음 날, 정요섭 등 목포파는 자수했습니다. 그러나 사건의 주범이었던 실질적인 두목 장진석과 김동술은 도망쳤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위치를 파악한 경찰은 5명의 무술 고단자 형사를 급파해서 대치 끝에 이들을 검거했습니다.



그 후 12월, 재판에서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칼을 휘두른 주범 김동술과 고금석은 사형을 받았고, 김승길과 장진석은 무기징역, 그 외의 조직원들도 각각 징역에 처해졌습니다. 그리고 약 3년 후, 김동술과 고금석은 1989년 처형되었습니다. 장직석도 사형이었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31년 후 사면되어 출소했습니다.

 

서진룸살롱 사건과는 관계없는 일이었지만, 그 후 수사 중에 김태촌과 고위검사가 연루된 '뉴 송도 호텔 나이트클럽 사건'도 터졌습니다. 그 후 조폭들이 보수당 민정당(구. 국민의힘 보수계보)의 정치인과 연결된 사건으로까지 번지면서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 ⓒ chosun.com 

 

고금석의 여인과 박삼중 승려

국민들에게 큰 충격을 준 서진룸살롱 사건 이후, 그와 관련된 두 사람의 이야기도 화제가 되었습니다.

사형이 선고된 고금석은 선배들을 잘못 만나서 죽게 된 안타까운 사연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육자 집안에서 자라나 반듯하게 커 왔다고 합니다. 항상 예의 바르고 인사성도 밝았으니 고향 마을 사람들은 믿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수감 생활 중 주변 사람을 감동시키는 모범수 생활을 했습니다. 불우한 재소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 반드시 도왔고, 영치금을 모아서 바다 구경이 소원이라는 강원도 오지의 아이들에게 해운대 구경을 시켜주기도 했습니다. 또한 박삼중 승려를 만나 독실한 불자로서의 신앙생활도 했습니다.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 ⓒ Unknown 

 

한편 고금석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소꿉친구였는데, 그녀가 고금석에게 면회를 가면서부터 사랑이 꽃피었습니다. 고금석의 여인은 면회를 거듭할수록 그가 성자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원래는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는 불교로 개종까지 하면서 고금석과 결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기결수는 옥중 결혼이 가능해도 미결수는 불가능했기에 사형수와의 부부의 연은 맺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고금석이 죽은 후에도 평생 그의 영혼을 위해 빌며 살기로 하고, 박삼중 승려에게 비구니가 되겠다고 요청했습니다. 착실했던 20대 초반의 청년, 그러나 한순간을 못 참아서 살인자가 된 청년의 마음은 더욱 아파왔습니다.



결국 고금석은 자신 때문에 비구니가 되겠다니 인연을 끊겠다며 모든 면회를 거부했습니다. 서진룸살롱 사건의 잔악한 살인자였지만 한 여자의 인생마저 망칠 수는 없다는 비장한 포기인 것입니다.

 

그 후 고금석은 영치금으로 모은 당시 돈 20만 원을 강원도 용소분교 학생들에게 후원하며 선행을 하다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그때 아이들과 있던 박삼중 승려에게 고금석의 사형이 집행되니 올라오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1989년, 사형집행 때 박삼중 승려는 고금석을 제대로 보지도 못할 정도로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고금석은 오히려 승려를 위로하는 말을 유언으로 남기고 사형을 받아들였습니다. 

 

 

1986년 서진룸살롱 사건 - 서진회관 살인사건과 고금석의 여인 / ⓒ Unknown 

 

그리고 살았을 때 약속한 장기 기증 약속에 따라, 그의 콩팥과 안구 등이 기증되었습니다. 사형을 앞둔 그는 옥중 편지에서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을 절절히 남겼다고 합니다. 서진회관 살인 사건의 사형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살인의 충동에 빠지지 않았다면... 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서진룸살롱 살인사건의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당시 20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 후 출소한 박영진은 2010년 동료 조직원인 장진석의 누나와 결혼한 소식이 뉴스에 나면서 또 한 번 화제가 되었습니다. 옥중 편지를 통해 사랑을 피운 이들은 행복한 결말을 맞았고, 이제는 독실한 신앙생활로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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